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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anne Sheehan & Eric Bach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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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Sheehan and Eric Bachman

1976년 8월 1일, 18명의 활동가들이 미국 뉴햄프셔의 씨브룩 핵발전소 건설현장에 걸어 들어갔다. 이는 미국의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최초의 집단적인 비폭력 직접 행동이었다. 당시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참여하던 많은 사람들은 이와 같은 행동이 너무 급진적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이 행동에 이어서 같은 달에는 이 운동을 주도하던 클렘쉘 연합(the Clamshell Alliance)에서 비폭력 트레이닝과 동질그룹 모델을 처음으로 활용하였고 그 결과로써 180명의 사람들이 핵발전소 건설현장에서 시민불복종 행동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루어졌던 비폭력 트레이닝 모델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이후 다른 많은 곳에서 사용되었다. 1977년 4월 30일에는 2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수백개의 동질그룹을 만들어서 위의 건설현장을 점거하였다. 이어진 이틀 동안 총 1415명이 연행되었고 이들 대부분은 2주 형을 선고받았다. 이 행동은 당시 핵발전소 반대 운동을 크게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이 행동은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과정'을 바탕으로 비위계적인 비폭력행동을 조직하는 하나의 국제적인 비폭력 운동 모델의 구체적 사례로 기억되고 있다.

씨브룩에서 있었던 위와 같은 행동은 사실 유럽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1970년대 초, 독일의 바일( Whyl)지역에 핵발전소가 건설될 예정이라는 소식에 독일과 프랑스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일과 접경지역인 프랑스 마르코샤임(Marckolsheim)에는 한 독일 기업이 라인강을 따라 납 공장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에 바일과 마르코샤임 양 지역의 주민들은 공동 대응을 하기로 합의하였고, 1974년 8월에는 독일 바덴 지역과 프랑스 알자스 지역에서 활동하는 환경 그룹들과 연대하여 21개 단체들로 구성된 국제위원회를 창설하였다. 그들은 양 지역 중 한 곳에서 먼저 건설이 시작되면 바로 그 곳을 비폭력의 방식으로 점거하여 건설을 가로막기로 결정하였다.

마르코샤임에서 노동자들이 납 공장 건설을 위한 울타리를 설치하기 시작한 후인 1974년 9월 20일, 이 지역의 여성들이 울타리 기둥 구멍에 올라가서 건설작업을 중단시켰다. 환경운동 활동가들은 울타리 주변을 따라 바깥쪽에 텐트를 설치했다가 나중에는 울타리 안으로 텐트를 옮겨서 그 곳을 점거하였다. 곳곳에서 이 행동에 대한 지지와 지원이 이어졌다. 독일의 한 아나코-평화주의자 매거진(Graswurzelrevolution)은 이와 같은 풀뿌리 비폭력 운동의 아이디어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도왔다. 건설현장 인접 지역인 독일 프라이부르그에 소재한 한 단체는 바일과 마르코샤임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적극적인 차원의 비폭력을 소개하였다. 1974년, 마르코샤임에서 열린 3일 과정의 워크샵에서는 비폭력 트레이닝이 포함되었고, 여기엔 300여명의 사람들이 참여하여 역할놀이를 하면서 경찰이 들이닥쳤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계획을 세웠다.

라인강을 두고 양쪽에 사는 농부, 주부, 어부, 교사, 환경주의자, 학생 등등의 많은 사람들이 건설 현장에 둥글게 생긴 목조건물을 짓고 '우정의 집'이라 이름을 붙였다. 마르코샤임에서의 점거는 그 해 겨울 내내 계속되었는데 결국 이듬해인 1975년 2월 25일에 프랑스 정부가 납 공장 건설허가를 철회함으로써 점거는 막을 내렸다.

한편, 독일 바일에서도 원자로 건설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 곳 건설현장에 대한 첫번째 점거는 1975년 2월 18일에 시작되었으나 며칠 지나지 않아 곧 경찰력에 의해 중단되었다. 하지만 2월 23일에 해외 각지에서 몰려온 30,000여명의 집회가 있은 후, 두번째 점거가 다시 시작되었다. 마르코샤임에서의 성공에 힘을 얻은 환경운동 활동가들 그리고 이 지역의 가족단위 참여자들은 점거를 8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그리고 20년 넘게 지속된 법적 공방 끝에 결국 바일 지역 핵발전소 건설 계획은 백지화 되었다.

1975년 여름, 랜디 쾰러 그리고 베티 코너 이렇게 두 명의 미국 활동가들이 당시 네덜란드에서 열린 '전쟁저항자 인터내셔널(WRI)' 국제회의에 참석한 뒤에 바일 지역을 방문하였다. 그들은 '러브조이의 핵전쟁(Lovejoy's Nuclear War)'이라는 영화를 들고 갔는데, 그 영화는 미국에서 핵발전소에 저항하여 개인 차원에서 시작된 최초의 비폭력 시민불복종 행동을 다룬 영화였다. 바일 지역 방문 후 미국으로 돌아올 때에 그 두 명의 활동가들은 이 독일 조그만 동네에서 있었던 멋진 이야기들을 함께 들고 왔고, 이는 이후에 있었던 미국 씨브룩 핵발전소 반대 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양 국 그룹 사이의 소통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1976년, 씨브룩에서 점거가 벌어지고 있을 때 독일에 있던 WRI 소속 활동가들은 매일같이 전화기를 붙들고 클렘쉘 연합(the Clamshell Alliance)과 연락을 주고받았다. 독일 비폭력 활동가들은 그 이전부터 이미 '합의를 통한 의사결정' 모델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동질그룹 모델은 이 때 처음 접하게 되었다. 독일그룹은 이 동질그룹 모델이 행동을 조직하는데 아주 유용한 모델이라고 생각했다.

1977년, 독일의 활동가이자 트레이너인 에릭 바우만과 귄터 사토프가 미국으로 건너가 강연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국 북동부 지역에 있는 반(反)핵 운동 그룹들을 방문했으며, 디아블로 캐년(Diablo Canyon) 지역 핵발전소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어고 있던 캘리포니아 지역 그룹들도 방문을 하였다.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양 지역의 활동가들은 이와 같은 교류 과정을 지속하였다.

마르코샤임과 바일에서는 결과적으로 핵발전소나 납공장이 들어서지 않았다. 씨브룩의 경우에는 원래 계획되었던 원자로 두 개중 하나는 결국 건설이 되긴 했지만, 이후 미국에서는 지금까지 더 이상의 핵발전소가 건설되지 않고 있다. 독일 바일과 미국 씨브룩의 사례는 이후 반(反)핵 운동의 시금석 역할을 했으며 다른 비슷한 운동들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정리하자면, 유럽에서 있었던 활동들이 미국 씨브룩의 클램쉘 연합에 영향을 미쳤고, 씨브룩의 사례는 다시 미국의 다른 지역과 유럽의 운동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씨브룩에서의 성공적인 사례가 기폭제가 되어 미국의 다른 지역인 쇼어햄, 롱 아일랜드, 뉴욕에서 이미 80% 정도 건설이 완료된 상태였던 핵발전소들에 대한 반대 운동도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었다. 이 지역들에서의 운동은 WRL(War Registers League)소속 동질그룹들이 씨브룩에서의 점거운동을 끝마치고 이 지역들로 옮겨오면서 본격화되었다. 한편, 1977년 씨브룩에서의 점거에 참여했던 영국 활동가들과 이 소식을 <평화 뉴스>를 통해 접한 다른 활동가들은 동질그룹을 활용하는 운동방식을 영국에서도 시도해보고자 하였다. 이들은 당시 영국 토르네스 지역에 건설될 예정이던 핵발전소 공사 현장에 가서 위의 운동방식을 활용하여 점거시위를 펼쳤다. 독일에서는 수많은 핵발전소와 핵연료 재처리 공장들이 거센 시위에 부닺혀 문을 닫았다. 그리고 1980년대 초에는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 발사 시설 설치에 반대하는 거대한 시위들이 독일과 영국에서 일어났다 이 때의 시위들은 모두 동질그룹 모델을 활용한 행동들이었다. 이후에도 동질그룹 모델이 활용된 비폭력 행동은 전세계에 걸쳐 존재해오고 있다.(1999년 씨애틀에서 있었던 WTO회의 저지 행동도 이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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